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월 종파사건 (문단 편집) == 전개 == 위에서 서술한 소련공산당에서의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 이후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1956년 4월에 예정되어있던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과 당 운영의 민주화가 논의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개인숭배 움직임과 관련하여 오히려 엉뚱하게 개인숭배를 [[박헌영]]의 책임으로 뒤집어 씌우며 자아비판을 거부했다. 게다가 중공업 위주의 정책노선은 수정되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실망한 '8월 그룹'은 소련 대사관과 접촉하면서 자신들의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으나 공개된 소련 외교문서에서 8월 그룹은 김일성 실각을 애초에 도모한 적도 없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나마 리필규 등은 수틀리면 무력도 써야 한다고 강력히 언급했으나 그런 그조차도 일단은 김일성을 설득하여 박금철, 한상두, 박정애 같은 무능한 아첨꾼을 쫓아낸다는 것을 1차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술하였듯이 김일성은 자신의 측근들과 자신은 일심동체라고 똥배짱으로 나왔으며, 다만 최창익, 박의완 등에게 상무위원회 위원 자리를 주고, 박창옥, 윤공흠, 리상조, 리필규 등을 중앙위원회에 선거시켜주면서 약간의 당근을 제시했다. 또한 윤공흠을 부수상에 임명함으로 8월 그룹의 와해를 유도했다. 윤공흠 부수상 임명은 김광협의 반발로 무산. 하지만 이미 몰릴 데로 몰려 있던 8월 그룹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반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1956년 6월 1일부터 장기간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하는 외교활동을 위해 출국하면서 북한을 비우자 김일성 반대파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되었다. 과거 소련과 중국 자료가 공개되기 이전까지 소련 측의 태도에 대해서 김일성이 못마땅했던 소련이 연안계를 이용하여 김일성을 회치려 했다는 주장이 많았으나, 문서고가 열리고 나서 중국은 애초에 이들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으며, 소련도 괜히 헝가리나 폴란드같은 대소동이 북한에도 벌어질까봐 내정간섭을 하려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연안계를 일부러 방패막이로 내세웠느니 어쩌니 하는 것도 그냥 사후 오해석에 불과했으며 북한의 고려인, 연안계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소련, 중국 출신이라고 외국 명령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김일성 반대파의 움직임은 [[최용건]]을 필두로 한 김일성의 심복들에게 포착된다. 최용건은 반대파의 움직임을 즉시 김일성에게 알렸고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에 [[박정애]]와 [[남일]]을 파견하여 소련에게 더 이상 반대파 인사들과 접촉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등 자신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무마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한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 이상의 공산주의 운동 경력을 갖고 있고 당내에서 명망이 높았던 최용건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여들이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최용건은 결국 동북항일연군 시절부터 함께 활동했던 김일성 쪽으로 붙어서 오히려 김일성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8월 종파사건에서 최용건의 역할이 어땠는지는 굉장히 논쟁적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지도자감으로 인정받은 김일성과 달리 무식하고 성격이 포악한 최용건은 심각하게 인기가 없었고, 1955년 김일성이 빈말로 최용건을 수상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자 모든 세력이 결사반대하고 나설 정도였다. 최용건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가 8월 그룹에 가담할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 것은 건재국장 리필규인데, 션즈화 교수는 리필규의 증언이 문제적이라고 평가한다. 다만 평양시 당위원회 부위원장 홍순관의 증언에 따르면, 최용건이 빨치산 파이지만 민족보위상 재직 시절 김일성과 마찰이 많아서 김일성 반대파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본 사람들이 많았는데, 김일성이 최용건을 회유하였고, 리필규와 달리 최용건을 좋아하지 않았던 윤공흠이 전원회의 석상에서 조선민주당 소속이었던 최용건을 다짜고짜 당 정치위원, 부위원장에 등용함으로 당내 민주주의를 파괴했다고 비판하자 빡돈 최용건이 천황 폐하 만세 외치던 개새끼가(윤공흠은 지주 집안 출신으로 일본 비행학교를 졸업했다) 어디서 망언이냐고 윤공흠을 구타하려고 달려드는 등 최용건이 8월 그룹에 가담할 가능성은 완전히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김일성파의 조직력이었다. 다른 계파들, 즉 소련파는 아예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았고 연안파는 고만고만한 지도자들이 많은 데다가 남로당파는 박헌영 및 남로당 쪽 지도자들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서 거의 와해 직전이었다. 반면 김일성파는 만주 빨치산 시절부터 김일성을 정점으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에 이런 권력 투쟁시에 다른 계파에 비해 조직력이 강했다. 김일성에 대한 반대파의 공개적인 도전은 1956년 8월 30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발언한 김일성의 지지파들은 서휘와 윤공흠이 책임자로 있던 직업동맹과 상업성을 비판했는데, 이는 김일성 지지파가 반대파의 중심인물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의 반대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윤공흠이 김일성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를 비판해야 하는 핵심을 벗어나 김일성의 간부정책 비판'''으로 방향을 벗어나게 된다. 이는 김일성 지지자들이 다수였던 전원회의 참석자들을 자극하였고 윤공흠은 이들에 의해 억지로 단상에서 끌려내려오게 된다. 중국으로 망명한 서휘는 윤공흠이 김일성의 간부들, 특히 당시 당 간부들의 신망이 높았던 [[최용건]]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비정치적 과오'였다고 생전의 회고에서 밝히고 있다.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체험한 윤공흠과 서휘 등 연안파 인사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자동차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하여 [[신의주시]]로 향한다. 이들의 탈출은 김일성 반대파들의 권력투쟁에서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오후에 계속된 회의에서 김일성 지지파들은 반대파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반대파의 대표였던 [[최창익]]은 "당의 노선에는 문제가 없으나 개인 숭배의 움직임에는 문제가 있다"고 발언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후였다. 소련파인 박창옥은 "자신은 어떤 그룹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발언하였지만 주석단과 회의장에서의 항의가 들끓어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서휘와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은 박탈되었다.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옥]]은 내각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즉, '''반대파의 정치적 숙청'''으로 결과가 도출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운동이었던 8월 종파사건은 이렇게 김일성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사실 김일성 반대파들의 계획은 생각보다 허술했다. 김일성 지지파들의 수가 더 많은 상황에서 한번의 회의를 통해서 김일성을 끌어내린다는건 어려운 일이었고 게다가 김일성의 개인숭배 문제나 정책문제를 공격하는 데에 집중하지 않고 당내에서 신망이 높았던 [[최용건]]을 공격하면서 더욱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신들을 부추겼던 [[소련]]이나 역시 김일성에 불만이 있던 [[중국]]의 개입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두 나라는 생각보다는 적극적으로 북한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출당된 인사들의 복당을 요구하는 정도로만 개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